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펠로폰네소스 전쟁 (문단 편집) === 시칠리아 공격과 아테네의 재앙(기원전 415~기원전 414) === 이탈리아 남서부의 큰 섬 [[시칠리아]]는 초반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비껴나 있었지만, 점차 전쟁과 관계가 깊어갔다. 시칠리아의 작은 도시들은 아테네와 같은 이오니아인들이 세웠지만, 가장 강력한 도시인 시라쿠사는 스파르타와 같은 도리아인이 세웠다. 시라쿠사에게 위협을 받던 작은 시칠리아 도시들은 강력한 아테네를 끌어들여 시라쿠사를 견제하고자 하였고, 아테네에게 있어서도 시라쿠사는 언제든지 스파르타와 연계될 수 있는 잠재적 적국이었기에, 아테네가 전쟁 중에 이곳에 진출할 이유는 충분했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의 자원은 아테네가 군침을 흘릴 만한 것이었다. 1차 시칠리아 원정(기원전 427~기원전 424) 때 아테네는 시칠리아로 배 스무 척을 보내 시라쿠사에 맞서 동맹국들을 지원하였으나,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기원전 425년 아테네는 증원군 40척을 보내지만, 가던 길에 필로스에서 스파르타와 싸우느라 늦어버렸고, 그 사이 시칠리아의 아테네 동맹국들은 "시칠리아인을 위한 시칠리아"를 천명하는 평화협정을 맺어 버렸다. 이로 인해 아테네는 시칠리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아테네는 시칠리아를 집어삼킬 요량으로 시라쿠사와 다른 도시국가들간의 분쟁이 생길 때마다 계속 집적거렸는데, 기원전 416년 세게스타라는 작은 도시국가가 아테네에 구원을 요청해왔다. 세게스타는 이웃 도시 셀리누스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아테네를 끌어들일 생각을 하였는데, 자신들이 모든 전쟁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제안해왔다. 실제로는 그만한 재력이 없었던 세게스타는 아테네를 속이기 위해 우선 60탈란트(1560 kg)어치 은화를 제공했고, 아테네의 사절이 왔을 때 그들이 가진 모든 금과 사치품을 싸그리 모아 보여주면서도 보여주지 못한 재산이 더 많다고 과장하였다. 당시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사망 이후, 평화주의자 [[니키아스]]의 주장으로 기원전 421년 스파르타와 휴전을 맺었으나(니키아스 평화조약), 주전파의 젊은 지도자 [[알키비아데스]]가 다시 주전론에 불을 활활 지피고 있던 상황이었다. 아테네 민회는 격론 끝에 전함 60척과 경보병만 파견하고, 알키비아데스, 니키아스, 라마코스에게 지휘를 맡기기로 하였다. 사령관이 3명이나 선출된 것은 주전파의 지도자인 알키비아데스와 온건파의 지도자인 니키아스를 모두 포함시키고, 여기에 군경험이 많은 노장 라마코스를 포함시켜 조화를 꾀하고자 한 것이었다. 니키아스는 이후의 민회에서도 계속 알키비아데스를 까대면서 원정을 반대해 봤지만, 이미 원정으로 기울어진 민심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시칠리아의 부와 국력을 과장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겁을 주어 이 원정을 취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테네 민회는 오히려 원정대의 규모를 두배로 늘려, 전함 134척에 [[호플리테스|중장보병]]만 해도 5천 이상, 함대 운용인력을 계산하면 2만 이상이라는 대규모 전력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여기엔 아테네뿐만 아니라 아르고스 등 동맹국 병력도 상당수 존재했다. 그런데 출항 전날 밤, 누군가가 행운의 표시인 헤르마[* [[헤르메스]] 흉상이 새겨진 직사각형 돌기둥.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긴장과 헤르마 훼손이 어우러져 탄생한 아테네인들의 강박은 아테네인으로 하여금 [[소크라테스]]의 신성모독 사건에 크게 분개하게 하였다.]를 다수 파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은 가짜 증인을 내세워 알키비아데스파의 행위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군대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알키비아데스는 원정 이전에 재판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 탄원은 기각되었고 알키비아데스는 원정군과 함께 출항하였다. 원정이 시작되어 군인들의 표가 없어질 때까지 기다렸던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은 궐석재판을 열고 신성모독 혐의로 알키비아데스를 소환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알키비아데스는 적국 스파르타로 망명을 해버렸는데, 이후 몇 년간 그는 마치 [[관도대전]] 중에 [[조조]]에 망명한 [[허유]]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시칠리아로 도착한 아테네 원정군은 사실 세게스타에 약속한 돈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황당한 상황에서 원래 온건파였던 니키아스는 세게스타의 적국에게 무력 시위만 하고 돌아가자고 주장했지만, 결국 다른 사령관 2명의 의견을 따라[* 이 때까지는 아직 궐석재판이 열리지 않아 알키비아데스도 망명하지 않고 사령관으로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시라쿠사를 공격하기로 했다. 아테네 원정군은 시라쿠사군을 야전에서 격파하였고, 시라쿠사를 포위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소극적인 니키아스는 애초에 그 자신이 원치 않던 원정에 때마침 병까지 앓았다. 설상가상으로 알키비아데스는 도망가버리고 라마코스는 포위망 건설 즈음에 전사하여 소극적이고 몸도 아픈 니키아스가 전권을 쥐고 지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편 아테네군에게 포위당한 시라쿠사는 사방으로 원군을 구하러 다녔다. 때마침 스파르타로 망명해 온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게 시라쿠사까지 원군을 보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하면서, 또한 아테네 근처의 데켈레아를 점령하고 요새화하도록 조언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스파르타는 명목상으로는 아테네와 휴전 중이었으나, 아테네의 시라쿠사 원정을 휴전 협정의 파기로 간주하였고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나 시라쿠사에 대한 스파르타의 초기 지원은 매우 작은 규모였는데, 스파르타와 코린트 각 2척으로 구성된 함대에 스파르타 완전시민 병사는 한 명도 없었고 지휘관 귈립포스마저 완전시민이 아닌 모타케스(열등자) 출신이었다.[* 참고로 귈립포스는 앞서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뇌물 수수로 사형을 선고받고 도주한 클레안드리다스의 아들이다. 이번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뒤 귈립포스는 해군 사령관 리산드로스의 명에 따라 남은 자금을 국가에 바치는 일을 맡게 되는데, 유혹을 참지 못하고 상당수를 착복했다가 발각되어 추방당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볼품없는 병력이 봉쇄를 뚫고 상륙에 성공하여 시칠리아 전역에서 지원병을 모으고 아테네군의 포위망 건설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결국 포위벽 건설은 실패로 돌아가고, 원래부터 열의가 없었던 니키아스는 아테네에 원정군이 위기에 빠졌다고 서신을 보내 철수 허가를 받고자 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답변은 정반대였다. 에우리메돈과 데모스테네스 지휘하에 비슷한 규모의 2차 원정군을 파견한 것.[* 아테네 시는 데모스테네스의 지원군을 충당하기 위해 각 동맹국에도 지원 요청을 보냈는데 트라키아의 디오이족 경보병 1300여 명은 늦게 도착하여 시칠리아로 떠날 수 없었고 아테네에선 이들을 붙잡아 두면 자신들이 경비를 대줘야 하기에 디에이트레페스의 인솔로 돌려 보냈다. 이들은 귀환길에서 한 가지 범죄를 저질렀다. 내륙의 작은 도시 미칼레소스로 쳐들어가 약탈과 학살을 벌여 주민 대부분을 도륙해 버린 것이다.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고 학교까지 쳐들어가 아이들을 살육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테베에서 구원군이 달려와 이들을 쫓아냈지만 이미 미칼레소스는 완전히 파괴된 뒤였다.] 도착한 데모스테네스는 니키아스의 지휘가 너무 무기력하고 소극적이기 때문에 위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가했다. 그러나 시라쿠사 성벽에 대한 야간공격 와중에 서로를 오인하고 전투를 벌여 실패하였고, 많은 아테네군이 절벽이나 경사에서 떨어져서 사망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테네군의 영채는 습지에 있어서 질병이 만연해 있었다. 나중에 왔던 에우리메돈과 데모스테네스는 이제 철수를 원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원래 반원정파였던 니키아스가 철수에 반대하고 나섰다. 원정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 당시 아테네에서 패전한 지휘관이 처벌을 받지 않은 예는 매우 극소수에 불과했다. 많은 이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운이 좋으면 추방을 당했다.]과 아테네의 명성에 금이 가는 것을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시라쿠사의 재정이 소진되면서 친 아테네 세력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기대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테네군이 밍기적거리는 동안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지원군이 도착했고, 이제 아테네에게 철수밖에 남은 대안이 없어졌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때마침 [[월식]]이 일어나면서, 이를 불운함의 징조로 받아들인 신관들이 '아흐레씩 3번'을 기다릴 것을 조언했고, 니키아스는 이 예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철수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장면인데, 플라톤의 대화편 중 <[[라케스]]>에서 니키아스는 소피스트에게 교육을 받은 매우 교양 있고 논리정연한 사람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화편에서 그는 예언가들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며 비판한다. 플라톤 당대에는 니키아스가 미신에 의존하다 죽었음이 잘 알려졌을 터, 이렇게 이론과 교양을 중시하는 사람이 미신에 빠져 죽었다는 역설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묘사하려는 의도로 이렇게 캐릭터를 구성한 모양.][* 당시 월식에 대해 역사가 필로코로스는 다른 해석을 했다. 도주하려는 자들에게는 달빛이 가려진 것이 오히려 길한 징조라는 것이다.] 그 사이 시라쿠사 해군은 아테네 해군을 격파하고 출구를 봉쇄했으며, 절망적 상황에 몰린 아테네 함대가 며칠에 걸쳐 결사적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시라쿠사 해군이 방어에 성공하면서 아테네 원정군은 시라쿠사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아테네 원정군 약 4만 명은 이제 둘로 나누어져 육로를 통해 주변 동맹국으로 탈출하고자 했지만, 추격에 나선 시라쿠사군이 허둥대던 원정군을 차례로 덮쳤고, 원정군은 괴멸되었다. 스파르타의 장군 귈립포스는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를 포로로 잡아가려고 했지만 시라쿠사군은 그들을 처형시켰고, 포로 약 7천 명은 이후 대부분 노예가 되어 채석장에서 가혹한 강제노동을 당하다가 죽었다. 이 원정에서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의 직속 함선 160척을 포함하여 함천을 총 216척 잃었고 도합 4만에 달하는 인력을 모두 상실, 그외에 원정군에 투입되었던 비용 4500탈란트를 고스란히 날러버렸다. 전쟁 이전에 아테네의 연 수입이 1천 탈란트였으므로 거의 5년치 예산이 한순간에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데모스테네스, 라마코스, 니키아스, 에우리메돈 등이 전사하거나 사망하였고, 알키비아데스는 망명해 버리는 등 경험 많고 유능한 인물들도 다수 잃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후 스파르타에서도 정적을 만들어 페르시아로 망명했다가, 아테네에 과두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아테네로 돌아갔다.] 스파르타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는 시라쿠사에 원군을 보냄과 동시에 아테네 근처 데켈레아를 점령하고 요새화할 것을 조언하였는데, 아테네의 육상 식량수송로를 제압할 수 있는 데켈레아 요새는 [[신의 한 수]]가 되어 이후 계속 아테네를 괴롭혔다. 이뿐만 아니라 시라쿠사는 이후 아테네에 맞서 스파르타에 대규모 함대를 제공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시칠리아가 꽤 먼데다 탈출한 사람이 거의 없었던 관계로 아테네는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났어도 패전 사실 자체를 몰랐다. 아테네인들이 이 소식을 들은 건 여행자가 "시칠리아에서 아테네군 전멸했는데 아테네는 괜찮아 보이네?" 하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이발사에게 얘기하자, 혼비백산한 이발사가 손님도 내버려두고 광장으로 나가서 이 소식을 전한 뒤에야 시칠리아 원정군이 전멸했음을 알았을 정도다. 저 소식을 전해준 여행자는 법정에 소환되었는데, 누구에게 들은 말이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자 유언비어를 퍼트리려는 수작이라 모함받아 전령이 소식을 전하러 올 때까지 오랫동안 바퀴에 묶여야 했다.[* 플루타르코스-니키아스 전에서 발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